미국에 있음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운 날이다. 할아버지가 (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괜찮아지셔서 다시 한국에서 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너무나 예상치 못한 일을 갑자기 들어서인지, 머릿속이 백지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이렇게 블로그에라도 두서없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허무함과 슬픔을 적어둬야겠다.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그냥 단순한 '아빠의 아빠'가 아니다. 난 첫 손자였고, 대학교 시절 4년동안 함께 살았다. 그 당시 이미 70대 중반이었던 할아버지는 회사에 계시는 시간보다 집에 계시는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고 오면 거의 항상 집에 계셨다.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달려갔어야 하는데. 가보지도 못하는 이런 모습이라니.
기숙사에 잠깐 살았던 시절의 에피소드. 주말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꼐 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내가 마치 굶었던 사람처럼 너무 맛있게 고기를 와그작와그작 먹어대는 모습에 할아버지께서 나 먹으라고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할머니한테 들었다.
일요일 오전엔 거의 규칙적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당뇨가 있으셨던 할아버지는 항상 노란 크림이 들어간 빵과 팥빵 코너에서 서성거리시면서 기어이 한두개 집어들고 장바구니에 넣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나에게 너무 맛있다면서 먹으라고 적극 권하곤 하였다. 내가 먹지 않으면, 이 맛있는 것을 먹을 줄 모른다며 너무 맛있게 두 입만에 드셨는데.
여름철 햇볕은 따가웠다. 길에서 우연히 할아버지를 만나면, 정말 '할아버지' 다운 모습인데, 땀을 흘리면서 길거리를 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생신 선물로 밀짚으로 만든 중절모를 하나 선물하였다. 할아버지는 '남사스러운' 모양에 모자 쓰고 다니는걸 몹시 부끄러워 하셨지만, 나의 성화에 결국 쓰고 다니셨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얼굴이 빨갛게 되고 씩씩 거리면서 집에 들어오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까마귀 한마리가 할아버지 머리를 쿡 쪼았는데, 다행이도 모자에만 구멍이 나고 머리는 멀쩡했다.
내 성적표를 복사해서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 손님들이 오면 자랑하기에 바쁘셨던 것. 저녁때 맥주 '한모금'만 드시던 것. 여름철과 겨울철에 즐겨입으시던 잠옷. 노란 금테가 둘러졌던 안경과 납작했던 안경 케이스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다는 낙엽색 스웨터를 입으셨던 것. 잠깐 앉아서 같이 얘기하자고 하면, 기본적으로 1-2시간은 훌쩍 넘겼던 것. 핸드폰 고지서가 오면 인터넷 결합 상품이라던지 기타 등등 광고지를 내밀면서 항상 물어보셨던 것. 큰 손자이기 때문에 집안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한다면서 해주셨던 이야기들. 정말 커다란 돋보기로 팩스의 흐릿하고 작은 글씨를 보시던 것. 노래방 18번 "미쓰 리" 등등.
너무나 많은 소소하고 단편적인 기억들이 끊임 없이 떠오른다. 난 울지 않는다. 울고 싶지 않다. 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를 인정하고 슬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페이스로, 오랜 시간동안,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