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 /지구별 사파리

코로나 시대의 일과 삶: 서울 한달살기 #31 (feat 마마쿡 대치점)

보스턴돌체씨 2020. 12. 27. 14:47

미국에서는 잘 먹지 못하는 음식들이 손가락 하나로 문 앞까지 배달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냥 반찬도 먹고 싶어졌다. 특히 샐러드가 아닌 (한국) 나물들은 왜 이리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지. 

 

그래서 반찬 가게를 검색해봤고 가장 가까이 있는 마마쿡 대치점을 방문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예쁘게 담긴 반찬들이 가득한 가게에서 결정 장애가 왔지만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를 연신 되내이며 여섯 가지만 골랐다. 

 

구입한 반찬들: 미역줄기 볶음, 달래오이무침, 동전 쥐포 볶음, 단호박 샐러드, 톳나물무침, 오곡찰밥 이상 2만 1500원. 

 

보스턴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한 상이 차려졌다. 

고춧가루 범벅이어도 마늘이 좀 많이 들어 있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으니 참 좋다. 

두 차례 허리 수선에 들어갔던 테일러 마고 맞춤 정장 바지를 드디어 찾아왔다. 첫 측정 했을 때보다 정확히 1인치가 늘어났고 이제는 잘 맞는다. 이 빨간 정장을 내년 가을 쿠알라룸푸르에서 입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이상하게 한국에 있으면 피부가 좋아진다. 좁쌀 트러블도 다 들어가고 피부결도 부드러워진다. 씻는 물, 먹는 음식이 싹 다 바뀌어서 원인을 또 모르고 가겠지만 보스턴에서도 지금처럼만 유지되면 정말 좋겠다. 


김신지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게 취미> 


매일 국문 책을 한 권씩 읽겠다는 12월의 번갯불 목표는 잘 지켜지고 있다. 일상의 작은 순간을 포착하고 사랑해나가는 류의 고만고만한 에세이를 20권 넘게 읽었더니 키워드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뿐만 아니라 내용만 봐도 책 출판 연도와 작가의 나이대도 대충 알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전세계을 일시 멈춤 시킨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에 나오는 에세이들은 어떠할까? 강도는 다르지만 모두의 삶에 충격과 변화를 가져온 2020년의 일상들은 어떻게 기록될지 새삼 궁금하다. 

  • 그렇게 시작한 수집은 별것 아닌 듯해도 조금씩 일상을 바꾸었다. 아무렇게나 오가던 일상에, 남들은 모르는 무용한 기쁨을 모으는 주머니가 하나 생긴 기분. 기억하고 싶은 것은 주워 담고, 어떤 것은 그냥 둔다. 그런 식으로 일상이 쌓이는 게 좋았다. 
  • 순간을 모아두려는 것은 인생의 사소한 구석까지 들여다보려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순간에 머무르려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구나. 알고 나면, 앞으로 나를 좀 더 자주 그런 순간으로 데려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 나의 매일에는 작은 기쁨들이 숨어 있다는 것. 삶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할 구석이 많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참 앓고 난 뒤처럼 좀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긴 인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 삶은 대체로 퍽퍽한 건빵 같은 일상이 이어지지만, 그 속엔 또한 별사탕 같은 순간들이 숨어 있다. 그러니 실망 말고 손가락을 잘 더듬어서 별사탕을 찾아낼 것. 비록 건빵 건빵 건빵 건빵 다음에 목 메일 떄쯤 별사탕이더라도, 그렇게 맛본 행복을 잘 기억해둘 것. 그게 행복의 ㅎ 정도는 알게 된 사람이 ㅎ을 늘려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 바다에 몸 담그는 시간보다 생활에 몸 담그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동동 떠서 즐거움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밀려오면 잽싸게 올라타야 한다.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짧으니까. 고꾸라진 뒤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기다림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즐거움이 밀려 올 때까지. 
  • 무엇이든, 자신을 평소의 자신보다 조금 더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 있따면 그것을 좋아하자. 아주 많이 좋아해버리자. 그럼 그 무언가가 모르는 사이 인생을 서서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그건 아마 좋은 나를 조금씩 연습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좋은 나를 만나고 알아가는 연습한 기분은 내 속에 남아 나를 차츰 그런 사람으로 만든다. 
  •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뭐든 열심이지만, 사실 다 살고서 돌아보는 시점에선 그 '열심'이야말로 인생을 낭비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건 좀 이상한 말이기도, 기운 빠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과하게 파이팅이 들어가 있어 기운을 좀 빼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 이번 겨울엔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눈 내린 풍경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기온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야지. 우리 인생을 그런 것들로 형성돼있으니까. 그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어쩌면 이 겨울이, 여든이 되어서도 기억날 만한 단 한 번의 겨울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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